본문 바로가기

글로 만나는 세상/어디에 선들 어떠랴

설사


어디에 선들 어떠랴


『작가후기』

지면을 통해 시를 처음 발표한 지 열다섯 해만에 시집 하나 엮는다.

그 사이 개인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.

실로 감당하기 힘든 달라짐이었다.

이래저래 부대끼면서도 내가 얻은 소중함은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

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.

그런 사람들이 늘 튼실하게 함께 했으면 좋겠다.

이 시집을 엮으면서 남기고 싶은 글보다 조악하기 때문에

버리고 싶은 것들이 훨씬 많다.

삶의 터전을 담고 싶었는데 오히려 흠집만 낸 느낌이다.

허나 어찌할 것인가,

돌이켜보면 부끄러운 것들조차 이미 나의 한 부분인 것을...!

바램이 있다면 이 빈약한 시가 어려운 시절에 함께 했던, 지금도 하고 있는,

섬을 사랑하는 여러 벗들에게 그나마 갈기갈기 씹히는 안주감이라도 되면

그냥 참 좋겠다.

정축년 정월 대보름

- 시인 김수열 -


설 사


한숨을 몰아쉰다

담배 하나 입에 문다

문고리를 걸고

내릴 것은 내리고

쪼그리고 앉는다

촛불 켜듯 성냥을 긋고

기도하는 마음으로

두 손을 모은다

눈을 감는다

숨결을 고른다

무게 중심을 아래쪽으로 옮긴다

배꼽 밑이 팽팽하게 불거져 온다

가만히 기를 쓴다

가만히 기를

가만히

가만

아,

똥이다

마침내 똥이다

눈부신 해방이다

<1995>